우에스기 나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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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스기 나리사다는 요네자와 번의 11대 번주이다. 1788년 우에스기 가쓰히로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 사다요시였으나 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이름을 받아 나리사다로 개명했다. 1794년 우에스기 하루히로의 양자가 되었으며, 1812년 하루히로의 은거로 번주직을 계승했다. 번주가 된 후,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치세로 재건된 번의 통치 기반을 확립하고, 덴포 대기근 당시에는 백성들을 위한 구휼 정책을 펼쳤다. 1839년 사망했으며, 장남 우에스기 나리노리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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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번은 센고쿠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다테, 가모, 우에스기 가문이 통치했으며,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개혁으로 재정난을 극복하고 교육과 복지에 힘썼으나, 보신 전쟁 패배 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 1788년 출생 - 이규경
이규경은 19세기 조선의 학자로서, 60권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저술하고 실학 사상을 계승하며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여 초기 개화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1788년 출생 -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 왕녀
바이에른 왕국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국왕의 장녀인 아우구스테 아말리아 폰 바이에른 왕녀는 외젠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여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이 되었고, 자녀들의 혼사를 통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다.
2. 생애
덴메이 8년(1788년) 9월 4일, 요네자와 번의 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맏아들인 우에스기 가쓰히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간세이 6년(1794년), 우에스기 하루히로의 양자 우에스기 아키타카가 사망하자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교와 2년(1802년) 기헤이지로 개명하였다. 분카 3년(1806년) 에도 막부의 유학 관리인 고가 세이리가 나리사다의 세자 교육을 위해 초빙되었다. 분카 6년(1809년) 4월 원복식을 치른 후 하루히로의 딸과 혼인하였고, 분카 9년(1812년) 9월 7일 하루히로의 은거로 번주직을 계승하였다.[1]
이 무렵 요네자와 번은 명군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치세로 번 통치와 재정이 재건되어 있었다. 하루노리가 죽은 이듬해인 분세이 5년(1823년), 번의 상인에 대한 채무를 모두 상환하여 번 통치 기반을 확립하였다. 오이시 쓰나토요를 집정으로 삼아 번 통치를 담당시켰고, 선대로부터의 현안이었던 이토요 산 관개 사업도 분세이 원년(1818년)에 완성되었다.[1]
덴포 대기근이 발생하자 덴메이 대기근 때 하루노리의 시책을 본받아, 번주 스스로 죽을 먹고 백성에게 쌀을 지급하는 등 한 사람의 아사자도 나오지 않게 하는 수완을 보였다. 덴포 2년(1831년) 번사 봉록 대출을 중지하고, 50석 이하 하급 무사에게 수당금을 주었다.[1] 덴포 10년(1839년) 2월 2일, 52세로 사망하였고, 맏아들 우에스기 나리노리가 뒤를 이었다.[1]
2. 1. 어린 시절
덴메이 8년(1788년) 9월 4일, 요네자와 번의 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맏아들인 우에스기 가쓰히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사다요시'''였으나, 이후 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편휘를 받아 나리사다로 이름을 바꾸었다.간세이 6년(1794년), 우에스기 하루히로의 양자 우에스기 아키타카가 사망함에 따라 나리사다가 후계자로서 지명되었다. 양할아버지이자 고모부인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은거소인 요네자와 성 산노마루(三の丸|산노마루일본어)의 찬하관(餐霞館|산카칸일본어)에서 하루노리에게 길러졌고, 잠자리를 같이 하였다. 하루노리는 양손자의 교육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밤에 용변 시중도 직접 들었다고 하며, 교외의 농촌을 함께 걸으며 가르쳤다고 한다. 간세이 11년(1799년)에는 하루노리와 함께 아카유 온천(赤湯温泉|아카유 온센일본어)으로 요양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이때, 아키타카를 보좌하던 코토 마사모치가 나리사다의 보좌관이 되었고, 진보 쓰나타다가 시독을 맡았다.
교와 2년(1802년)에 기헤이지로 개명하였다. 분카 3년(1806년)에는 나리사다의 세자 교육을 위해 하루노리에 의해 에도 막부의 유학 관리인 고가 세이리가 초빙되었다.
2. 2. 번주 즉위와 번정 개혁
간세이 6년(1794년), 10대 번주 우에스기 하루히로의 양자 우에스기 아키타카가 사망하자, 나리사다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양할아버지이자 고모부인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은거소인 요네자와 성 산노마루(三の丸|산노마루일본어)의 찬하관(餐霞館|산카칸일본어)에서 하루노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루노리는 나리사다의 교육에 특별히 신경을 썼고, 간세이 11년(1799년)에는 함께 아카유 온천(赤湯温泉|아카유 온센일본어)으로 요양을 가기도 했다.[1]교와 2년(1802년) 기헤이지로 개명하였다. 분카 3년(1806년), 하루노리는 나리사다의 세자 교육을 위해 에도 막부의 유학 관리인 고가 세이리를 초빙했다. 분카 6년(1809년) 4월, 원복식을 치른 나리사다는 하루히로의 딸과 혼인하였고, 분카 9년(1812년) 9월 7일 하루히로가 은거하자 번주직을 계승하였다.[1]
나리사다가 번주가 될 무렵, 요네자와 번은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노력으로 번의 통치와 재정이 안정된 상태였다. 분세이 5년(1823년), 하루노리가 사망한 다음 해에 번은 상인에 대한 채무를 모두 상환했고, 나리사다는 번 통치의 기반을 확립했다. 오이시 쓰나토요를 집정으로 임명하여 번의 통치를 맡겼고, 선대부터 추진해 온 이토요 산 관개 사업도 분세이 원년(1818년)에 완공되었다.[1]
덴포 대기근이 발생하자, 나리사다는 덴메이 대기근 당시 하루노리의 정책을 본받아 스스로 죽을 먹고 백성에게 쌀을 지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아사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덴포 2년(1831년)에는 번사로부터의 봉록 대출을 중지하고, 50석 이하의 하급 무사에게 수당금을 지급했다.[1]
2. 3. 덴포 대기근과 구휼 정책
덴포 대기근 당시 우에스기 하루노리가 덴메이 대기근 때 시행했던 정책을 본받아 여러 조치를 취했다. 나리사다는 스스로 죽을 먹으며 솔선수범했고, 백성들에게 쌀을 지급하여 아사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도록 했다. 1831년(덴포 2년)에는 번사들의 봉록 대출을 중지하고, 50석 이하 하급 무사에게는 수당금을 지급했다.3. 서임 이력
4. 가계
5. 나리사다 시대의 주요 가신
참조
[1]
간행물
沖縄県立博物館紀要 20号
1994
[2]
서적
上杉鷹山
[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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